소장: 국립중앙박물관
규격:97.0 X 56.5 cm
도암(陶庵) 이재(李縡)(1680-1746)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로서, 벼슬은 이조 참판과 대제학을 지냈다. 이 초상화는 한국 사대부의 초상화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7분면이고 복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인데, 심의(深衣)에 폭건(幅巾) 차림을 하여 유풍(儒風)이 감돈다. 화법상으로 볼 때 안면은 치밀한 육리문(肉理文)을 재현하면서 능숙한 훈염법으로 처리하였다. 얼굴의 정치한 필법에 의습의 간략한 필선을 대비, 조화시켜 완성도가 높은 수작이라 하겠다. 일본 학자 구마가이(熊谷宣夫)는 채용신(蔡龍臣)의 후손의 진술을 토대로 하여 채용신이 이재가 죽은 뒤 손자 이채(李采)의 초상화를 토대로 그린 것으로 보고 있어 흥미롭다.《이재상》과《이채상》은 관모나 자세의 차이를 빼면 용모가 매우 흡사하다. 또 도암 이재가 살았던 18세기 전반의 보편적 화법 치고는 이재 초상화의 표현 기법에 너무 정묘한 음영이 깃들어 있고, 색채 또한 양화계(洋畵界)의 기운이 현저하다. 그러나《이채상》의 화면에 적힌 찬문 속에《이채상》의 제작시 이미《이재상》이 전해오고 있었음이 밝혀져 있어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다만 화법상 이 작품을 당시 전해오던《이재상》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확실하다 (자료출처:문화관공부)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반대한 노론(老論)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호락논쟁(湖洛論爭) 당시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하여 낙론(洛論)을 주창했다.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한천(寒泉).
저서로는 〈도암집〉·〈근사심원 近思尋源〉·〈오선생휘언 五先生徽言〉·〈검신록 檢身錄〉·〈존양록 尊攘錄〉·〈사례편람 四禮便覽〉·〈주자어류초절 朱子語類抄節〉 등이 있다. 용인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